대학 동기 중에 스물 다섯 살 L형이 있었다. 카이스트에 다니다 자퇴를 하고 인문계열로 다시 입학한 사람이었다. 스무 살의 눈에 스물 다섯 살은 어찌나 어른으로 보이던지.
지금 생각해도 L형은 스물 다섯 살 치고 좀 올드한 스타일이었다. 동글동글한 얼굴, 별로 크지 않은 키에 단정한 헤어스타일, 금테 안경에 칙칙한 점퍼를 입고 다녔고, 경상도 사투리는 사근사근 했다. 여자 동기들이 말을 걸면 얼굴이 붉어지는 게 빤히 보일 정도로 숫기가 없었다. 그래도 남자 애들과 있을 때는 말도 곧잘하고 잘 웃는 사람이었다. 쉬는 시간이면 카세트 테이프를 넣은 워크맨을 듣고 있었는데, 영어 공부를 위해서라고 했다.
그 시절 L형의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하곤 했다.
원래 학교를 그만 둔 이유는 정확히 말한 적이 없는 것 같고, 인문계열로 다시 학교를 입학한 이유도 분명치 않았다. (혹은 내가 듣지 못했다.) L형은 행정고시를 보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비장한 표정으로 하는 말이 남자가 스물 다섯이 넘으면 뭔가를 이뤄야 한다는 것이다. 그때의 말투가 아직도 생생하다. 별로 친한 사이는 아니어서 L형이 인문학 공부에도 관심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카이스트를 그만두고 인문계열로 다시 입학한 사람이 기껏 목표로 삼은 게 고시 패스이고(당시는 지금처럼 고시 열풍이 극성이던 시절은 아니었다), 스물 다섯이 넘으면 남자는 뭔가를 이뤄야 한다는 이상한 말이나 하고 있으니, 그의 삶이 잘 와닿지 않았다.
L형은 군필자였다. 남자 동기들은 "우와, 군대도 다녀오셨어요?" 감탄하며 이것저것 물었다. L형이 들려준 군대 이야기가 있다. 훈련소에 들어갔는데 동기 중에 꼴통 한 명이 있었다고 한다. 한마디로 조교가 뭘 시켜도 그냥 개기는 사람이었다. 옆에서는 아무리 뭐라뭐라 해도, 어르고 달래고 어떤 위협을 가해도 정말 꿈쩍도 안 하더란다.
"야 그런데 나는 그 때 느낀 게, 사람이 향기가 난다는 게, 사람한테서 정말 향기가 나더라."
"향기가 난다는 게 뭐에요? 그 사람이 그렇게 멋있었어요?"
"아니, 멋있다는 거랑은 좀 달라. 그냥 향기가 났어. 사람한테서 향기가 나더라."
그는 계속 같은 말만 되풀이했고, 대화는 거기까지였다.
그를 마지막으로 본 게 1학년 말이던가, 2학년 때던가...기숙사에 사는 친구 방에 놀러갔는데, 녀석이 역시 기숙사에 살고 있던 L형 방에 놀러간다길래 따라갔다. L형을 굉장히 오랜만에 본 참이었는데, 컴퓨터 앞에 앉아서 뭔가를 열심히 하고 있었다. 독하게 고시 공부를 시작하기 전에 자신의 온라인 커뮤니티와 이메일 계정을 모두 삭제하는 중이라고 했다. 그는 줄곧 모니터를 쳐다보며 우리와 이야기를 나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인사를 나누고 방을 나왔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스물 다섯 살짜리는 그냥 혼자였던 것 같다.
그나마 L형과 친했던 동기 녀석도 학교를 졸업한 이후의 L형 소식은 알지 못했다. 고시는 붙었는지, 뭔가를 이루긴 했는지, 그렇게 쑥맥이던 사람이 결혼이나 했는지, 모르겠다. 지금 만나도 별로 공유할 얘기가 많을 것 같지는 않지만, 이것저것 물어보고 싶은 게 있긴하다. 마지막으로 본 순간 어딘가 어둑한 곳으로 걸어가고 있는 것만 같던 L형이 가끔 생각난다.
L형도 그 훈련소 동기의 소식을 궁금해하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