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올해의 책

프레시안 '올해의 책' 서평 공모에 보냈던 글.
총서 획득에는 실패했지만...

나의 2011 '올해의 책'은 단연, 조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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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은의 산문은 쉽지 않다. 눈길을 잡아끄는 문장에 이끌려 가볍게 평지를 걷는 기분으로 출발해보지만, 이내 가끔씩은 멈춰서 숨을 골라야 하는 산길로 접어든다. 글쓴이의 호흡은 한결 같은데 읽는 이의 감정은 서서히 흔들린다. 발아래만 바라보며 문장에서 문장으로 건너가기가 쉽지 않다. 시선은 글자 사이에 머물러도 생각은 이미 텍스트 너머로 한참을 날아가 텍스트와 공명하는 내 삶의 어느 한 순간을 아프게 헤매고 있다. 정신을 가다듬고 다시 글로 돌아오지만, 몇 발자국 못 걸어가 다시 생각에 잠긴다.

“정말이지 모든 인연들이 그 같은 강도로 나와 맺어진다면 무슨 수로 관계의 밀도를 다 견뎌낼 수 있을까, 싶었다.”

밀도였다. 이렇다 할 기승전결에 기대지 않는 그의 산문이 읽는 이를 그토록 숨차게 하는 이유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 사람과의 관계에서 파열음을 내며 터져 나오는 감정들, 이성적인 논리로는 설명되지 않는 인간사의 사건들, 언어로는 조형해내기 힘든 여러 것들을 조은은 섬세하게 매만져 꽉 찬 문장으로 빚어냈다. 편안히 앉아 책을 읽다가 가슴을 압박해 들어오는 삶의 편린을 맞닥뜨릴 때면 숨이 차지만, 작가의 여정을 외면할 수 없다. 글을 읽으면 그가 쓰기 위해, 쓰면서 견디었을 삶의 밀도를, 알겠다. 읽는 이의 손을 잡아 이끄는 그도 힘겹게 산을 오르고 있다. 책장을 덮지 못하고 숨을 고르며 따라 올라간다.

“남산에서 나는 이를테면, 자루 속에 든 나무라는 삶을 눈앞에 꺼내놓았다. 그리고 그 나무의 어디가 금이 갔는지, 어디가 옹이 졌는지, 어디가 썩었는지, 어디가 끝까지 지켜야 할 고갱이인지 찬찬히 살펴보았다. 생각에 잠겨 걸었던 시간들은 한 인간의 본성이 자신의 전체 삶과 어떻게 연관되어야 하는지 알게 해주었다.”

<마음이여, 걸어라>는 조은이 2년여에 걸친 시간 동안 경주 남산을 걸으며 만난 사람들, 함께 걸은 사람들, 남산의 무엇이 그의 기억 속으로 다시 불러들인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그리고, 그 이야기 속에서 길어 올린 작가 자신에 대한 이야기다. 작가가 길을 걸으며 소환하는 인연들은 “상처에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는 굵은 소금 알갱이처럼 치명적”인가 하면, “꼭 풀어야 할 나의 정신적 매듭을 하나씩 손에 들려주는 듯한” 느낌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그 길 위에서 작가는 젊은 시절 그토록 증오했던 아버지를 닮은 석불의 입가를 오래도록 매만지고, 염주를 돌리며 느릿느릿 남산을 걷던 한 남자의 전화기에서 흘러나온 “다 용서하고…….” 라는 말에 왈칵 눈물이 솟구친다.

조은이 걷고 있는 남산은 그토록 깊고, 어두워 세속을 사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하나쯤 지니고 있을 내면의 종기를 마주하게 한다. 어느새 우리는 작가와 함께 손을 뻗어 남산의 삼체불을 어루만지고, 동트기 전 암흑 속에서 미친 듯이 칠불암을 찾아 헤맨다. 그러나 이는 신산스럽거나 절망적인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체험이다. 그의 고백은 단순히 배설하고, 이해를 바라고, 공감을 찾는 소모적인 행위가 아니다. 조은의 글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경주 남산을 소재로, 배경으로, 형식으로 삼은 그의 글은 우리를 ‘고양’시킨다.

“쉬지 않고 다섯 시간 가량 오르내렸으나 남산은 내게 ‘알 수 없는 산’이었다. 하지만 현실과 해탈의 엄청난 거리를 신라인이 그다지 멀리 두지 않았다는 사실만은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인간들이 어떤 깨달음을 촉매로 성큼 다른 상태(신의 경지와 다름없는 초월적 세계)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던 그들은 참으로 담대한 민족이었다. 늘 작은 인간으로 살아온 내게 그들의 세계관은 다가갈수록 매력적이었다.”

자유분방하게 세속의 욕망을 추구했던 신라인들과 해탈의 경지를 은유하는 마애불의 너그러운 미소는 신라의 정신적 열망이 가시화되었다는 남산에서 조화롭게 공존한다. 그 ‘알 수 없는’ 공존의 근원을 찾아가는 조은의 여정은 이 책의 또 다른 줄기다.

“그렇다면 부처는 분노의 감정을 통해 해탈했던 것일까? 인간의 한계점을 훌쩍 넘어서던 그의 그 의식, 그 깨달음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세속에서 해탈로 이어지는 사유를 조은은 성급히 진행하지 않는다. 여전히 과거와 현재를 살아가는 세속의 사람들을 시야의 중심에 둔 채 간간히 질문을 던져갈 뿐이다. 남산의 존재가 그러하듯, 조은이 풀어내는 인연이 그러하듯, 모순에서 출발해 모순을 넘어서야 하는 사유는 그의 언어로 설명되지 않는다. 그러나, 책의 마지막 장을 펼치는 순간 우리는 그가 수없이 남산의 길을 걸으며 던졌던 질문에 대한 어떤 열쇠 같은 순간을 마주하게 된다. 놀랍게도, 조은의 언어는 서술하지 않는다. ‘그려 보인다.’

“마애대불의 전신이 내려다보이는 곳에서 나는 다시 걸음을 멈췄다. “우리를 공중에 들어올려 그들의 거대한 키만큼 높여주는” 베르나르의 거인이 떠올랐다.”

작가와 함께 힘든 산길을 따라온 이들에 대한 선물이었을까. 그 선물 같은 순간을 마주하기 위해 우리는 조은의 책을 펼치고, 첫 장 부터 숨을 고르며 걸어야 한다. 조은의 주문에 따라, 마음을 움직여 걸어야 한다. 신라의 사람들과 세속의 수많은 인연들이 함께 걷고 있는 그 길을.       



by ktlu | 2011/12/29 01:31 | | 트랙백 | 덧글(0)
문화+정치

이 책의 원제는 ‘프랑스의 문화정치(La politique culturelle de la France)’다. 한국어판 제목에 따르면 문화가 정치의 영역에 속하는 대상임을 역설하고, 그에 대한 근거를 서술해놓은 책이라는 인상을 주지만, 역자는 “프랑스의 문화정치, 혹은 문화정책이 다룰 수 있는 주제의 영역 전반에 대한 이해의 틀을 제공하는 입문서”로 이 책을 정의한다. 역사적 사실과 통계자료, 관계자들의 발언과 글 등을 연대기적으로, 주제별로 정리해놓은 책이라 할 수 있다. 저자가 적극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하거나 결론을 제시하지 않는다는 점, 철저히 프랑스인의 시각에서 쓰인 저작이라는 점, 원서가 1996년에 출간되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2011년 한국’이라는 시공간에 위치한 독자에게는 저마다의 해석과 판단을 거쳐 책의 내용을 수용하는 노력이 요구된다. 
 
이 책은 문화의 개념에 대한 고찰(1장)에서 시작해 국가가 문화유산의 보호를 독점하고, 예술을 사회의 공공재로 간주해 국가의 정치적ㆍ법률적ㆍ행정적 책임 아래 두는 프랑스식 문화정치의 개념이 형성된 역사(2장)를 살핀다. 이어서 1958년에서 1996년 사이, 즉 프랑스 제5공화정 시기 문화정치의 세부적인 항목을 탐색하고(3장), 분야별 문화정치의 활동과 그 결과를 진단한다(4장). 문화적 통합을 위한 유럽 대륙의 움직임과 유럽 각국의 문화정치를 비교한 뒤(5장), 마지막 장을 통해 당대 문화정치의 쟁점과 위험요소를 지적한다. 각 장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지만, 독립적인 글로도 읽을 수 있다. 자신의 관심사에 따라 각 장이 다루고 있는 주제 중 일부를 택해 집중하는 것도 하나의 독법이 될 수 있다.  

물론 ‘문화’와 ‘정치’라는 두 개념의 만남에 대해 주목하면서 한국어판 제목이 제시하는 사유의 틀을 따라 가보는 것도 유용하다. 사실 ‘문화정치’란 단어는 생소하지만, 문화라는 분야가 정치와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은 한국인에게 낯설지 않다. 지난 정권 교체 시기, 현 정권 인사들은 전 정권이 임명한 문화 관련 부처와 공공 기관 관계자들에게 특정 정치 이념에 치우쳤다는 엉뚱한 혐의를 부여했고, 이로 인해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쫓겨난 이들이 적지 않았다. 문화 분야 역시 권력 투쟁의 장으로서의 정치에서 예외 지대가 될 수 없음을 대중에게 각인시킨 계기였다. 그러나 이 책이 다루고 있는 정치의 개념은 즉물적인 권력 투쟁의 장보다 훨씬 외연이 넓다. 국가 공동체 내 다양한 이해관계자 사이의 상호 합의를 끌어내고, 자원을 배분하며, 정책을 집행하는 행위로서의 정치 개념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 문화의 육성과 보호를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는 굳건한 사회적 합의 아래 프랑스가 발달시켜온 문화 관련 정책과 제도, 철학의 역동적인 지형도는 협의의 문화정치에 익숙한 한국 사회가 우선적으로 주목해야할 지점이다.

책을 통해 발견하게 되는 프랑스 문화정치의 특징 중 하나는 비록 정부가 문화정치를 주도하기는 하나 지방자치단체, 민간단체, 기업, 교육 기관 등 다양한 주체와의 갈등을 조정해 문화정치의 동반자로 끌어들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정부가 이들의 협력을 얻기도 했고, 때론 이들 스스로가 문화정치의 주체로 나서기도 했다. 일례로 직업 음악가들을 지원하는 ‘음악창작기금’은 작가-작곡가 저작권 협회, 예술가를 위한 시민단체, 문화부 등이 협력해 만든 단체이다. 국가 지원금을 일절 받지 않고, 참여 기구들의 분담금을 바탕으로 운영되지만, 이 단체는 문화정치의 일원으로서의 활동과 책임에 무심하지 않다. 이 단체가 새로운 목표로 삼은 활동은 국가의 지원이 닿지 않는 영역에서 프랑스 문화 수출과 보호를 위한 다양한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것이며, 직업 음악인들은 이 단체 활동을 통해 독자적인 문화정치를 수행해낼 수 있는 자신들의 능력을 증명하기 위해 노력했다.              

또한 좌우파 정권을 막론하고 프랑스 문화부의 수장들은 복잡한 정치지형 속에서 부여되는 현실적인 요구들을 파악하고 대처하는 데 추진력과 유능함을 발휘했다.
“자크 뒤아멜의 정책은 말로의 정책과 극단적으로 달랐다. 행정 실무에 더 밝았던 뒤아멜은 문화가 문화부라는 게토 안에서만 머무르는 것을 피하고, 프랑스 행정 전체에 ‘문화를 다루어야 하는’ 절대적인 필요성을 확산시킬 줄 알았다.”     

좌파 정권인 미테랑 정부의 문화부 장관 자크 랑 역시 취임 후 예산 확보를 위해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쏟았고, 역설적으로 기업의 메세나(문화예술 지원) 활동이 가장 활발하게 장려된 것도 좌파 정권 아래에서였다. 정치적 다수파가 계속 바뀌는 과정에서 정책의 연속성과 문화정치의 기본 정신이 유지되었다는 점도 눈여겨봐야 한다. 문화를 바라보는 정치가 개개인의 인식 수준과 철학도 한몫 했겠지만, 문화 일반에 대한 사회적 합의와 이를 현실에 적용하는 정치의 기능이 정상적으로 작동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저자가 지적하듯 프랑스의 문화정치가 완벽한 성공만을 거둬온 것은 아니다. 그러나 프랑스인들은 관료화, 세계화, 엘리트주의 등 문화정치를 위협하는 문제들을 은폐하지 않고, 사회 공론장과 정치의 장으로 끌어내 고민해왔다. 정부가 “문화라는 아이템의 산업” 정도로 문화를 인식하는 한국의 현실에선 사치스러운 주문일지 모르지만, 한국에서도 진정한 의미의 ‘문화정치’의 가능성을 모색하기 위해서는 문화와 정치의 결합에 뒤따르는 수많은 난맥과 갈등 요소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레몽 물랭의 말이다. 

“예술가들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으면서, 그들의 안전을 보장해야 하며, 권력의 압력 없이 예술 창작을 지원해야 하고, 공식적인 예술의 절대적인 권위의 힘을 빌리지 않으면서, 훌륭한 예술 정책을 펴야 한다. 가치를 표현하는 데 만장일치의 합의를 도출할 수 없는 공동체에서, 이는 지극히 예외적인 어려움을 수반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도이다.”

 

* SPACE 2011년 12월호
* <문화는 정치다> 리뷰  


 

by ktlu | 2011/12/05 23:47 |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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